[경남의 거인들] 구암 이정과 효당 최범술
조선 유학의 토대를 쌓다, 구암 이정
사천이씨 문중인 구암 이정은 1512년 현 사천읍 구암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 ‘구암’은 마을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구암은 12세 때 하과(夏課)에 장원하고, 25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구암은 조정에 유학 관련 서적이 적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젊은 시절부터 학문서적을 중국으로부터 구입, 조선 유학의 토대를 쌓았다. 구암은 퇴계 이황에게도 명나라 서적을 많이 구입해준 것으로 유명한데, 구암의 유학서적 지원이 퇴계 학문의 바탕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고 한다.
구암은 30세 때 영천군수를 비롯해 선산군수, 청주목사, 경주부윤, 순천부사를 역임했다. 3년간 경주부윤을 맡았던 구암은 옛 신라 수도였던 곳의 왕릉을 보수하고 건물을 수리했다. 또한 설총, 김유신, 태종무렬왕 제사도 지내게 했다. 순천부사시절 구암은 사화로 순천에 유배된 사림의 명예회복에 심혈을 기울였다. 영호남의 명예로운 이름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구암은 70여 통 편지를 주고받았을 만큼 퇴계와 평생 교류했다. 구암은 도산서원을 찾았고, 퇴계는 사천을 찾았다. 구암은 10살 연장자인 퇴계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퇴계는 구암을 고제(高弟)라 하여 친구처럼 대했다. 두 학자의 우정은 지금도 구계서원 제향 때 도산서원에서 퇴계 문중이 내려와 더불어 제향함으로써 이어지고 있다.
박열과 독립운동을 한 한국 다도(茶道)의 거두, 효당 최범술
효당 최범술은 경남 곤양군 양포면 금진동 율포(현 경남 사천시 서포면 금진리 율포)에서 아버지 최종호와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5년 3월 곤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사천 다솔사로 출가한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영남지역에 배포하다 일본경찰에 붙잡혀 고통 받기도 했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간 효당은 8월에 박열과 만나 박흥곤, 육홍균 등과 불령선인사를 조직, <불령선인지>를 간행했다. 이준익의 영화 <박열>에서도 묘사됐듯 효당은 박열의 일본천황암살계획을 돕고자 상해로 잠입해 폭탄을 운반했고, 대역사건에 연루돼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34년 사천에 광명학원을 설립한 효당은 2년 뒤 다솔사 불교전수강원을 설립했다. 효당은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대한불교단체대표에 임명된 그 해 해인사 주지가 됐고, 국민대학 창설 후 이사장에 취임했다. 1948년 5·10선거 때 사천, 삼천포에서 출마해 제헌국회의원에도 당선된 바 있는 최범술은 1951년에 해인중학교와 해인고등하교를 창설, 1960년 이후엔 다솔사의 조실(祖室)로 원효교학 및 다도 연구에 전념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원효 외에도 의천, 초의, 만해 등 여러 갈래였고 사천에 차밭을 가꿔 ‘반야로’라는 정제증차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한국 다도의 입문서라 일컫는 <한국의 차도>를 집필하며 사라졌던 우리 다도를 복원하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효당은 1979년 7월 10일에 입적 후 다솔사에 부도를 봉안했다. 1986년엔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정리 김성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