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불교의 가장 유명한 고승인 성철은 1912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났다. 한 가정의 장남이자 가정까지 이뤘던 그는 1936년에 출가해 지리산 대원사를 거쳐 합천 해인사에서 동산 대종사에게 사미계(沙彌戒, 십선을 지키도록 한 계율)를 받고 법명인 ‘성철’을 얻어 승려가 되었다. 2년 뒤 운봉을 계사(戒師, 수계의식에서 모셔야 하는 삼사 중 하나)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은 성철은 봉암사에서 청담과 더불어 수행하며 불타(佛陀, 석가모니의 다른 이름)답게 살자고 결사하는 등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다.
지눌의 돈오점수에 맞서 돈오돈수(불교에서 단박에 깨쳐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제시한 성철의 뜻은 이후 불교 철학계에 활발한 돈·점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성철은 ‘지행합일’ 단계의 ‘지’만이 진정한 ‘지’라고 못 박았다. 그는 지눌의 돈오점수는 직접 지각하거나 체험할 수 없는 관념과 표상에 경도돼 실증성이 희박한 ‘지’일 뿐 참 ‘지(知)’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대목으로, 지눌은 일반인에게 불교 교의를 풀어 밝힌 반면, 성철은 수행하는 승려에게 설법했다. 가르치는 대상이 달랐던 것이다.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여 깨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인정하겠노라.”
중국에서 임제종(臨濟宗)을 개종한 임제의 후예 청원유신 선사의 말이다. 여기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은 성철이 원용하면서 국내서도 유명해졌다. 이 말은 수도자가 작고 대수롭지 않게 득도했을 때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인 듯 혼란스럽지만, 득도하는 규모가 커지면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된다는 뜻이다. 즉, 외부 세계나 자연을 주관 작용과 독립해 존재한다고 관망하는 태도를 갖게 된다는 말과 같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인가해줄 만한 선지식이 없다고 여길 경우 독서를 통해 깨달음을 스스로 점검하라고 가르친다.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어 보이는 고승을 발견하지 못할 때엔 여러 고전을 살펴 스스로 경지를 점검케 하는 것이다. 눕지 않고 면벽수도 하는 ‘장좌불와’ 8년, 토굴 수행 10년 등을 거친 성철은 그래서 책 보는 시간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열반 뒤 발견된 그의 ‘서적기’에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 헤겔의 <역사철학>, <소학>과 <대학>, <하이네 시집>, 기독교의 <신구약성서> 등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그중에서도 성철이 가장 감명깊에 읽은 책은 영가 대사의 [증도가]였다. 성철은 이 책을 읽는 순간 캄캄한 밤중에 밝은 횃불을 만난 듯했다고 말했다.
말년의 성철은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병고를 앓다 1993년 11월 4일 해인사에서 향년 82세(법랍 58세)를 일기로 입적했다. 입적 전 남긴 유언은 '참선 잘 하그레이(하거라)'였다. 다비(화장)한 뒤 사리는 해인사의 사리탑에 안치했다. 당시 110여과에 이른 사리는 1994년 충북 고입선발고사 1번 문제에 등장하기도 했다.
정리 김성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