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거인들] 홍의장군 곽재우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경남의 거인들] 홍의장군 곽재우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 김성대 기자
  • 승인 2019.04.16 12: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의령의 자랑 '홍의장군' 곽재우.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郭越)과 진주강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영남 유학자인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했고 후에 조식의 외손녀 사위가 되었다. 평생 은거 생활을 결심했던 곽재우는 1592년 5월 2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연이은 관군의 패배와 선조가 의주로 피난했다는 소식에 6월 1일 사재를 털어 고향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붉은 옷으로 철릭을 해 입고 이불에 '천강 홍의 장군(天降 紅衣 將軍)'이라 적은 깃발을 만들었는데, 이는 나중에 자신의 별칭이 된다.

곽재우는 2천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의령과 창녕 산악 등지에서 신출귀몰하며 왜군의 호남 진격을 막았다. 또한 적 보급선을 기습해 보급을 차단하는가 하면,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싸움에 원군을 보내 대첩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그는 1592년 5월 함안군을 함락·점령 후 정암진(鼎巖津, 솥바위나루) 도하 작전을 전개한 왜군과 교전해 대승을 거두기도 했는데, 정암진 대첩을 비롯한 그의 연전연승은 관군의 잇따른 패배와 비교되며 곽재우를 유명인사로 만들어주었다.

나라 형편이 어지러워지고 수군통제사 이순신과 죄없는 김덕령이 죽은 일을 통탄해 벼슬을 사퇴하고 은둔생활을 하던 곽재우는 1617년 4월 10일 망우정에서 사망했다.

사람들은 지역 유림들의 뜻으로 그를 추모하기 위해 의령 가태동에 충현사라는 사당을 세웠고, 광해군 때 그의 사당에는 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숙종은 그의 공적을 높이 사 1709년 증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하고, 다시 충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곽재우의 유품들은 보물 제671호로 지정되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은 1910년 2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병철 회장의 큰아들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 따르면 이병철 회장의 집은 “풍년이면 2000석, 가물면 1500석을 짓는” 부농이었다.

서당에서 공부를 하다 싫증을 느껴 지수보통학교에 입학한 이병철은 부모님을 졸라 11살 때 서울 수송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부에 흥미를 못 느낀 건 마찬가지였고, 1926년 이병철은 박두을씨와 결혼해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건강 문제로 1931년 와세다대학을 자퇴하고 귀국했다.

고향에 와 친구들과 노름판에 빠지는 등 허송세월을 보낸 이병철은 곧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 결심을 한 며칠 뒤 그는 부친에게 자신의 뜻을 말했는데 부친은 별말 없이 아들에게 사업자금을 내주었다고 한다.

이병철은 장사를 위해 경성, 부산, 대구 등지를 물색하다 고향 인근인 마산을 떠올렸다. 쌀 사업을 생각한 그는 조선 각지 쌀을 도정해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마산에 있다는 걸 알아내고 친구 2명과 동업으로 정미소를 차렸지만 실패했다. 이후 손을 댄 운수업, 부동산업도 잘 되진 않았다. 1936년 즈음 일이다.

그러다 대구 수동에 삼성상회를 열고 재기에 성공한 이병철은 해방 뒤 서울에 삼성물산을 세웠다. 6·25전쟁 때 전 재산을 잃는 등 몇 차례 고비는 겪었지만 제일제당, 제일모직 등을 설립하고 1964년 한국비료 인수 및 동양방송 설립, 1965년 중앙일보 창설 등 다방면으로 사업을 성공시켰다. 그 유명한 ‘사카린 밀수사건’은 이듬해인 1966년 9월 16일에 터졌다. 해당 사건은 당시 세무국장 발표대로 “한국비료의 이일섭 상무이사와 이창식(이병철의 2남 이창희의 가명. 이창희는 이 일로 서울교도소에 수감됐다.)이 사카린 원료인 OTSA 2400부대를 건설 자재와 함께 밀수입해 정상 수입품인 것처럼 매각하려다 부산 세관 감시과에 의해 적발된 것”이었다.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라는, 현 삼성그룹의 초석을 다진 이병철은 1974년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만들어 중화학 공업에 진출했고,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수출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춰 전자·화학제품, 중공업 등 대량 해외 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 삼성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는 이후에도 삼성정밀,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등을 설립해 회사 덩치를 키워나갔다. 의령에 사는 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이병철 회장은 용인 에버랜드와 삼성반도체를 자신의 고향인 의령군에 유치하고 싶어했지만 당시 군민의 90%가 반대를 해 무산됐다고 한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이 회장은 미술에도 심취해 많은 작품들을 수집·소장해오다 사후 호암미술관을 건립해 남겼다. 그는 국악과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은 1987년 11월 초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하고 같은 달 19일 폐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78세였다.

이 회장은 "내 생애의 80%는 사람을 뽑고 관리하는 데 보냈다" 말할 정도로 인재 선발과 관리를 매우 중시했다.

정리 김성대 기자


관련기사